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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노니, 왕이시여 진정하소서. 하고 만백성이 말했다.
사냥꾼의 밤(가제)
새하얀 설원 위로 무수히 떨어지는 신의 눈물은 차가워서, 그 해 세상의 모든 이들의 마음을 얼릴 듯 하였더라. 왕께서는 무참히 휘두르던 그 검 끝을 내리어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였다네. 하늘은 무심하여 새 푸르고, 아이는 새하얀 설원 위에서 홀로 붉고도 검었다지. 왕이 말을 멈추어 아이에게 조용히 다가갔네.
“아가.”
“…….”
아이의 공허한 시선을 바라보는 왕의 새파란 시선이 맞닿았다. 숨결마저 얼리는 이 차갑고 조용한 공간에 두 사람의 숨결이 순결하게 태어났다가 사라지고, 왕의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아이의 뺨을 포근하게 받쳐 올렸다. 태곳적 그대로의 때 묻지 않은 새끼짐승과도 같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던 왕이 아이의 눈가를 쓸고는 소리죽여 웃었다. 작고 여린 아이다. 산속에 버려진 새끼짐승과도 같은 것이 이전의 나와도 같구나. 미묘한 동질감, 혹은 기시감.
“아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누.”
푸르고 시린 왕이 보여주는 일말의 잔정은 아이를 흔들기에는 충분했던 것인지 아이의 시선이 왕에게로 갔지. 아이는 묵묵히 그를 눈으로만 쫓았으니, 왕은 아이가 가여워 새푸르게 웃었네. 자신의 털이 달린 새하얀 면사포와도 같은 망토를 벗어서 신부에게 씌우는 것처럼, 성스럽고 거룩하게 망토를 둘러주었다네.
“나와 가지 않으련?”
아가야, 함께 가자꾸나.
그 내면은 검고 푸르게 얼어붙은 왕이 유혹하네. 손을 내밀고, 기다리네.
“어디로……?”
“네가 숨 쉴 수 있는 곳으로. 새하얗지만은 않아 추악하고도 아름다운 나의 세계로.”
아이는 그 손을 잡아, 검은 세상으로 안내되었다네.
0.
사방이 비명과 절망으로 가득한 황폐한 대지를 아이가 둘러보았다. 아득히 들리는 숨넘어가는 울음소리가 애처로웠으나 이내 바람에 흩어진다. 산 자는 울부짖거나 도망가기 바쁘고, 이 땅을 밟고도 도망가지 않는 이는 아이와 그의 그림자들뿐이다.
세간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는 했다네. 신의 검, 아니면 미치광이. 아이는 갈 곳을 잃고 망연히 자신의 손에 들려진 핏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검을 바라보았다네. 아이의 먼 발치에 선 사내를 아는가. 아아, 주로 세상은 그를 신의 날개라고 부르곤 했었다. 사내의 머리카락은 아무도 모르는 그 속내만큼 까맣고, 가만가만히 내려앉은 속눈썹 아래로 드러난 눈은 짐짓 웅크리고 때를 기다리는 맹수의 눈처럼 샛노랬다. 이 세상에 둘도 없을 폭군이라고도 했고, 혹은 제왕이라고도 했다네.
“라르.”
가만히 아이가 소리내 부르는 소리에 그의 고개가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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